"우리 연구소 좀 살려주시오!" | 2008/10/18 15:34
/ 관심
"우리 연구소 좀 살려주시오!"
통일문제연구소가 죽게 되었다는 이 글 좀 읽어주사이다
(편집자주) 백기완 선생이 운영하는 통일문제연구소가 '주택재개발'이라는 이름하에 42년만에 강제철거당할 위기에 놓였다. 서울시는 연구소가 위치한 명륜동 4가 일대를 재개발정비구역으로 지정했고, 당장 18일 오후 3시 재개발조합의 첫 총회가 열릴 예정이다.
이에 가칭 '통일문제연구소 살리기 비상대책회의'는 이날 같은 시각 혜화동 올림픽기념 국민생활관 앞에서 '통일문제연구소를 지켜내자'라는 주제로 <통일문제연구소 보존과 주민생존권 보호를 위한 기자회견>을 열 예정이다. 앞서 지난 13일 백 선생은 지인들에게 편지를 보내 "통일문제연구소를 살려달라"고 호소했다. <민중의소리>는 연구소 측의 동의를 얻어 백 선생의 글 전문을 게재한다.
이 글은 땅불쑥한(특별한) 어느 누구한테 띄우자는 게 아닙니다. 이 벗나래(세상)에 던져보는 것입니다. 그것도 쓸까말까 몇 술이고 망설이다가 씁니다. 이야기는 딴 게 아닙니다. 그것이 1967년께니까 우리 통일문제연구소가 첫발을 내딛은 지가 어느덧 마흔 해가 지났습니다. 그러니까 퍽이나 오래 되었지요. 그런 연구소를 그냥 내버려두진 못할망정 연구소 집을 헐어 없애버리려는 때결(시간)이 몰아닥치고 있는 것입니다. ‘재개발’인가 무언가를 한다면서 야금야금 무너뜨리고 있고, 기둥뿌리는 뽑아내고, 대들보, 서까래는 짓모으고 마침내 ‘법’이라는 이름으로 집을 옹근채로 들어낼 끔찍한 날이 다가오고 있어 우리 ‘통일문제연구소 좀 살려주십사’ 그겁니다.
나이테는 굵어도 우리 연구소가 한 일은 크질 않습니다. 다만 1960년대 그때는 ‘통일’이라는 말도 꺼낼 수가 없을 때가 아닙니까?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하고 ‘초전박살’이란 전쟁도발적 막심(폭력)이 국가권력일 때 ‘통일연구소’란 이름도 쓸 수가 없고 그러니 어디든 이름을 걸 수가 없었습니다. ‘연구소 준비모임’ 그렇게 우리 집 큰들락(대문)에 붙여도 한밤에 누군가가 떼서 불을 지르고. 그래서 내 등때기에 매고 다닌다고 해서 연구소가 아니라 ‘백통일’, 그런 말을 들어가면서도 한 일이 좀 있었습죠. ‘통일’이란 ‘통’자를 여러 사람들 입에 올리게 한 것이요.
또 하나는 통일은 한낱 바램이 아니라 일구어야 할 하제(희망)라는 것을 일깨우는데 조금은 도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백범사상연구소’로 갈아달고 통일은 분단억압을 깨트리는 해방, 그 해방은 자유, 인권, 민주, 평등, 평화라는 것을 널리 알렸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때(감옥)엘 갔다 나오니 사무실이 없어져 중학 다니는 딸애의 월부로 들여놓은 지 석 달밖에 안된 피아노를 몰래 팔아 사무실을 얻기도 하다가, 1978년이든가 책을 몇 권 냈는데 가져가면 돈이 안 걷히고 할 일은 많고 그래서 빚으로 휘청일 적입니다. 시인 김지하 어머니가 돈 2백만 원을 내놓고 낙찰계라고 했던가, 아무튼 이자는 없으니 다섯 달 안에 갚으라고 해서 반가운 진땀을 흘리기도 하고. 장준하 선생이 어느 춤꾼의 춤을 보더니 눈시울이 붉어져 묻는 것이었습니다.
“문둥이 춤 그러지요. 통영, 고성, 오광대놀이에 있는….”
“저건 어디서 추는 거지요?”
“마당판이지요, 무대가 아니라.”
“그렇습니까. 그 마당판이 곧 분단 억압을 제끼고 일어나는 통일마당판 이겠네요.”
“바로 그거지요, 그래서 ‘통일마당집’을 하나 지어야 합니다.”
“그거 좋겠군요”
그러다가 장선생은 뻔뻔스러운 암살에 돌아가시고 나는 다시 잡혀가 매를 맞고 돌아오니 연구소가 또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집 큰들락에 ‘통일문제연구소’로 이름을 바꿔 달았더니 떼 내고선 우리 집 안방을 점령, ‘통일’이란 ‘통’자만 쓰면 잡아넣겠다고 새벽까지 웅크르거나 말거나 최열군한테 신문에 알리라고 했습니다. (1984년, 동아일보) 불을 지고 불구덩이로 뛰어들며 통일은 껍데기 통일이 아니다, 분단 독재 때문에 피눈물을 흘리는 랑이(민중)의 해방, 세계해방의 첫걸음이 곧 우리 통일인데 그 알짜(실체)는 노나메기 벗나래를 만드는 거라 했습니다.
그러나 사무실이 없어 허덕이다가 1988년 봄, ‘통일마당집 벽돌쌓기(100만돌, 한돌에 5백원)운동’의 첫발로 민족미술인협회 주최로 두술에 걸쳐 ‘통일그림전’을 열어 몇 푼의 돈을 만들었습니다. 이어서 학교나 거리모임이 있을 적마다 ‘통일마당집 만들기 한돌 쌓기’에 나서달라고 외치면 어떤 학생은 담배 한 꼬치, 어떤 애는 백원짜리 하나, 미국동포, 독일동포까지 십여만이 넘게 8천만 원을 모으고 이어서 백범선생의 붓글씨 가운데 하나는 미국 사시는 이만영선생이, 또 하나는 변박장 교수가(중앙일보) 사주기도 해 땅 서른두 평짜리 이층집, 오늘의 ‘통일문제연구소’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때 저는 여기저기서 피돋힌 말을 하고나면 그렇게도 개고기가 먹고 싶었으나 한돌이라도 더 쌓아야하는데 한 그릇 삼천 원밖에 안하는 것이지만 안 된다고 비지 백반만 먹고 다니다가 탈이나 병원 값이 8백만 원이 들고나자 젊은이들이 “이제 한돌쌓기는 접어두자, 그러다가 선생님께서 돌아가신다”고 해서 주저앉긴 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통일문제연구소는 무엇이겠습니까. 5백원이 아니라 단돈 백원씩을 모아 일으킨 맨 처음의 통일 집 아니겠습니까. 8‧15 해방이자 꺾인 허리라는 반역과 싸워온 피눈물, 그 빛나는 횃불이 아닐까요. 우리 연구소는 어떤 정권, 어떤 돈 많은 이의 도움 같은 건 단 한 푼도 받은바 없고 한해 예산, 한해계획, 해가 가고와도 해보내기, 해맞이의 술 한 모금을 못 나누어먹고 헌날(매일) 도시락이 아니면 라면을 끓여먹으며 그저 우리는 ‘아름다운 벗나래(세상) 만들기가 통일이다’ 그러면서 요 쪼매난 집을 깃발처럼 들고 있는데 말입니다.
이것을 헐고 아파트를 짓겠다고 이참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우체부가 던지고 갑니다. 서울 종로구 명륜동4가 구역 주택재개발정비사업조합 총회를 10월18일 늦은3시에 연다고. 이제 우리 연구소는 ‘어거지 힘’과 그야말로 불법인 ‘재개발 법’이라는 이름으로 밑두리를 갉아먹히고 있습니다. 한살매(한평생)를 무지무지한 한 골수로 살아온 우리, 통일밖에 모르는 우리 연구소를 군사깡패들보다 더 치사하고 더 간악하게 짓밟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아, 그렇지만 저는 벌써 늙었나 봅니다. 어쩌질 못하겠습니다. 그렇다고 앉아서 죽어야 하겠습니까. 마흔 해를 이어와 이제 막 봉우리라도 맺히려는 우리 연구소가 이렇게 숨을 거두는 수밖에 없을까요?
늙은 몸과 마음엔 비상이 걸렸는데 딴 사람들은 그런 걸 비상한 일이라고 아니 보시는지, (가칭)‘통일문제연구소 살리기 비상대책회의’라도 만들면 안 될까요? 그저 안타까워 글을 띄는 것입니다.
“우리 연구소 좀 살려주시오!”
이에 가칭 '통일문제연구소 살리기 비상대책회의'는 이날 같은 시각 혜화동 올림픽기념 국민생활관 앞에서 '통일문제연구소를 지켜내자'라는 주제로 <통일문제연구소 보존과 주민생존권 보호를 위한 기자회견>을 열 예정이다. 앞서 지난 13일 백 선생은 지인들에게 편지를 보내 "통일문제연구소를 살려달라"고 호소했다. <민중의소리>는 연구소 측의 동의를 얻어 백 선생의 글 전문을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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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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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중의소리
이 글은 땅불쑥한(특별한) 어느 누구한테 띄우자는 게 아닙니다. 이 벗나래(세상)에 던져보는 것입니다. 그것도 쓸까말까 몇 술이고 망설이다가 씁니다. 이야기는 딴 게 아닙니다. 그것이 1967년께니까 우리 통일문제연구소가 첫발을 내딛은 지가 어느덧 마흔 해가 지났습니다. 그러니까 퍽이나 오래 되었지요. 그런 연구소를 그냥 내버려두진 못할망정 연구소 집을 헐어 없애버리려는 때결(시간)이 몰아닥치고 있는 것입니다. ‘재개발’인가 무언가를 한다면서 야금야금 무너뜨리고 있고, 기둥뿌리는 뽑아내고, 대들보, 서까래는 짓모으고 마침내 ‘법’이라는 이름으로 집을 옹근채로 들어낼 끔찍한 날이 다가오고 있어 우리 ‘통일문제연구소 좀 살려주십사’ 그겁니다.
나이테는 굵어도 우리 연구소가 한 일은 크질 않습니다. 다만 1960년대 그때는 ‘통일’이라는 말도 꺼낼 수가 없을 때가 아닙니까?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하고 ‘초전박살’이란 전쟁도발적 막심(폭력)이 국가권력일 때 ‘통일연구소’란 이름도 쓸 수가 없고 그러니 어디든 이름을 걸 수가 없었습니다. ‘연구소 준비모임’ 그렇게 우리 집 큰들락(대문)에 붙여도 한밤에 누군가가 떼서 불을 지르고. 그래서 내 등때기에 매고 다닌다고 해서 연구소가 아니라 ‘백통일’, 그런 말을 들어가면서도 한 일이 좀 있었습죠. ‘통일’이란 ‘통’자를 여러 사람들 입에 올리게 한 것이요.
또 하나는 통일은 한낱 바램이 아니라 일구어야 할 하제(희망)라는 것을 일깨우는데 조금은 도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백범사상연구소’로 갈아달고 통일은 분단억압을 깨트리는 해방, 그 해방은 자유, 인권, 민주, 평등, 평화라는 것을 널리 알렸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때(감옥)엘 갔다 나오니 사무실이 없어져 중학 다니는 딸애의 월부로 들여놓은 지 석 달밖에 안된 피아노를 몰래 팔아 사무실을 얻기도 하다가, 1978년이든가 책을 몇 권 냈는데 가져가면 돈이 안 걷히고 할 일은 많고 그래서 빚으로 휘청일 적입니다. 시인 김지하 어머니가 돈 2백만 원을 내놓고 낙찰계라고 했던가, 아무튼 이자는 없으니 다섯 달 안에 갚으라고 해서 반가운 진땀을 흘리기도 하고. 장준하 선생이 어느 춤꾼의 춤을 보더니 눈시울이 붉어져 묻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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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둥이 춤 그러지요. 통영, 고성, 오광대놀이에 있는….”
“저건 어디서 추는 거지요?”
“마당판이지요, 무대가 아니라.”
“그렇습니까. 그 마당판이 곧 분단 억압을 제끼고 일어나는 통일마당판 이겠네요.”
“바로 그거지요, 그래서 ‘통일마당집’을 하나 지어야 합니다.”
“그거 좋겠군요”
그러다가 장선생은 뻔뻔스러운 암살에 돌아가시고 나는 다시 잡혀가 매를 맞고 돌아오니 연구소가 또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집 큰들락에 ‘통일문제연구소’로 이름을 바꿔 달았더니 떼 내고선 우리 집 안방을 점령, ‘통일’이란 ‘통’자만 쓰면 잡아넣겠다고 새벽까지 웅크르거나 말거나 최열군한테 신문에 알리라고 했습니다. (1984년, 동아일보) 불을 지고 불구덩이로 뛰어들며 통일은 껍데기 통일이 아니다, 분단 독재 때문에 피눈물을 흘리는 랑이(민중)의 해방, 세계해방의 첫걸음이 곧 우리 통일인데 그 알짜(실체)는 노나메기 벗나래를 만드는 거라 했습니다.
그러나 사무실이 없어 허덕이다가 1988년 봄, ‘통일마당집 벽돌쌓기(100만돌, 한돌에 5백원)운동’의 첫발로 민족미술인협회 주최로 두술에 걸쳐 ‘통일그림전’을 열어 몇 푼의 돈을 만들었습니다. 이어서 학교나 거리모임이 있을 적마다 ‘통일마당집 만들기 한돌 쌓기’에 나서달라고 외치면 어떤 학생은 담배 한 꼬치, 어떤 애는 백원짜리 하나, 미국동포, 독일동포까지 십여만이 넘게 8천만 원을 모으고 이어서 백범선생의 붓글씨 가운데 하나는 미국 사시는 이만영선생이, 또 하나는 변박장 교수가(중앙일보) 사주기도 해 땅 서른두 평짜리 이층집, 오늘의 ‘통일문제연구소’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때 저는 여기저기서 피돋힌 말을 하고나면 그렇게도 개고기가 먹고 싶었으나 한돌이라도 더 쌓아야하는데 한 그릇 삼천 원밖에 안하는 것이지만 안 된다고 비지 백반만 먹고 다니다가 탈이나 병원 값이 8백만 원이 들고나자 젊은이들이 “이제 한돌쌓기는 접어두자, 그러다가 선생님께서 돌아가신다”고 해서 주저앉긴 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통일문제연구소는 무엇이겠습니까. 5백원이 아니라 단돈 백원씩을 모아 일으킨 맨 처음의 통일 집 아니겠습니까. 8‧15 해방이자 꺾인 허리라는 반역과 싸워온 피눈물, 그 빛나는 횃불이 아닐까요. 우리 연구소는 어떤 정권, 어떤 돈 많은 이의 도움 같은 건 단 한 푼도 받은바 없고 한해 예산, 한해계획, 해가 가고와도 해보내기, 해맞이의 술 한 모금을 못 나누어먹고 헌날(매일) 도시락이 아니면 라면을 끓여먹으며 그저 우리는 ‘아름다운 벗나래(세상) 만들기가 통일이다’ 그러면서 요 쪼매난 집을 깃발처럼 들고 있는데 말입니다.
이것을 헐고 아파트를 짓겠다고 이참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우체부가 던지고 갑니다. 서울 종로구 명륜동4가 구역 주택재개발정비사업조합 총회를 10월18일 늦은3시에 연다고. 이제 우리 연구소는 ‘어거지 힘’과 그야말로 불법인 ‘재개발 법’이라는 이름으로 밑두리를 갉아먹히고 있습니다. 한살매(한평생)를 무지무지한 한 골수로 살아온 우리, 통일밖에 모르는 우리 연구소를 군사깡패들보다 더 치사하고 더 간악하게 짓밟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아, 그렇지만 저는 벌써 늙었나 봅니다. 어쩌질 못하겠습니다. 그렇다고 앉아서 죽어야 하겠습니까. 마흔 해를 이어와 이제 막 봉우리라도 맺히려는 우리 연구소가 이렇게 숨을 거두는 수밖에 없을까요?
늙은 몸과 마음엔 비상이 걸렸는데 딴 사람들은 그런 걸 비상한 일이라고 아니 보시는지, (가칭)‘통일문제연구소 살리기 비상대책회의’라도 만들면 안 될까요? 그저 안타까워 글을 띄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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